Anna의 다이어리에서

태초에 지닌 하얀 화병은
눈물겹게 순결한 진주빛이라서
나는 아무것도 심을 수가 없더라

그저 언젠가
황홀한 향기를 뿜는
심장만큼 붉은 장미가 자라리라
나는 꿈결처럼 생각했다

어느 날 씨앗이 별빛으로 빛나기에
아껴왔던 화병을 내었다
별빛이 이슬만큼 영롱해서
심장이 펑하고 터질 것만 같더라

올라온 새싹이 장미가 아니었는데
처음의 아련한 별빛 때문에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민들레의 벌꿀색 위에
계속해서 붉은 열정의 잔상이 눈에 밟히는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이 민들레가 사랑스러웠다

견디지 못한 것은 민들레더라
나는 장미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병의 꽃인 민들레를 사랑했고
민들레는 들판을 원했으므로
꽃을 틔웠으나 화병에 질려갔다

내것인 화병이 아닌 민들레의 바람이었지만
난 울면서 뿌리채 뽑았다

민들레는 들판에서 웃고
화병엔 상실로 금이 가더라

다시는 눈치없이 민들레 씨앗따위
고결함도 우아함도 없는 꽃
심지 말라고 화병은 말했고
그렇게 말하면서 울더라

원했던 장미가 아니었기에
민들레는 핏물같은 환상을 채워줄 수가 없어
그래서 뿌리채 뽑은거라고
나는 말했고 화병은 비웃었다
내가 뽑은 게 아니라, 민들레가 뽑혀지길 원했던거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눈앞에 장미 씨앗이 보여
심으려고 집어들었는데
화병은 더 이상 꽃을 담고싶지 않다고
이건 장미 씨앗이 확실한데
더 이상 금 갈 일은 없을 거라고
하니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싫다고

대답하는 화병 위에서 난
하얗게 질린 한숨을 보았다.

Advertisements
Tagged with:
Posted in 1) My Story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Recent Posts
누적 방문자 수
  • 144,299 hits
%d bloggers like this: